소원이 무엇이냐?

소원이 무엇이냐? [말씀동행 20180203토]

제 차에 ‘옛날 이야기’ CD가 있습니다. ‘은혜 갚은 호랑이’ ‘선녀와 나무꾼’ 같은 전래 동화들을 포함한 옛 이야기들 시리즈입니다. 저도 아이들과 함께 듣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게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얼마 전 시완이와 함께 ‘은혜 갚은 사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가난한 한 할아버지가 사냥을 갔다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신비한 사슴을 잡습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하는 사슴이 불쌍해서 그냥 놓아줍니다. 그러나 욕심 많은 할머니는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는 버럭 화를 내며 사슴을 찾아가 목숨을 살려준 댓가로 소원을 들어달라고 말하게 합니다. 사슴은 대궐 같은 기와집에 가구와 비단과 맛난 음식들까지 차례로 주며 소원을 들어줍니다. 그러나 욕심 많은 할머니의 끝도 없는 소원 때문에 결국에는 다시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다는 내용입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시완이가 말했습니다. “아빠~ 우리도 여기 숲 속에 들어가서 사슴한테 소원 들어 달라고 하자” “사슴 찾으면, 시완이는 어떤 소원 들어달라고 하고 싶은데?” “응~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인형이랑 우리 가족 매일 매일 천국 만드는 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천국(하나님 나라)을 고대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기다리는 방식과 태도에 따라 우리가 기다리는 천국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치 소원을 들어주는 신비한 사슴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례받고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삶이 천국처럼 느껴지지 않을때 혼란스러워합니다. 간곡한 기도로 부탁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고 계시거나, 예수님께서는 동화에 나오는 신비한 사슴만큼도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옛 이야기에 나오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이나 비단옷, 맛난 음식들처럼 눈을 감았다 뜨면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천국은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강제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천국처럼 변하려면 꼭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신 은혜와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 순종으로 반응하는 삶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짝입니다. 믿음은 있는데 순종이 없거나, 순종은 하는데 믿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순종의 분량이 곧 믿음의 분량입니다. 천국은 은혜로 주어지지만 믿음으로 보고 순종으로 캐내야 누릴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용납하라!’ 하시면 이유를 불문하고 순종으로 사랑하고 용납하는 겁니다. ‘불평과 원망을 그치라!’ 하시면 믿음으로 불평과 원망을 그치는 겁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 완전하신 손을 움직여 일하시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신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호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이 밭을 사느니라.” 마13:44


거룩한 지랄병

거룩한 지랄병 [말씀동행 20180124수]

속된 말로 “지랄총량불변의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시기와 방법만 다를 뿐 모든 인간은 일정량의방황과 회의 그리고 온갖 종류의 흔들림이 있어야 나침반처럼 인생의 정북을 찾아간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이 법칙대로라면,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 부모가 감당 못하는 ‘ㅈㄹ’을 하고, 어렸을 때 엄한 부모 밑에서 사방이 꽉 막혀 분출구가 없었던 사람은 장성해서라도 방황과 회의의 시간을 갖게 되겠지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영적인 지랄’ 을 가리켜 ‘죄’라고 할 것입니다. 통제불능인데다가 원치 않는데도 그리로 내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 그야말로 ‘영적인 ㅈㄹ’ 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바울도 자기 안에 원치 않는 ‘죄’라고 불리는 ‘ㅈㄹ병’이 있음을 일찌기 깨달았습니다. 집나간 탕자도 상식적이지 않은 ‘ㅈㄹ병’이 도져서 방황을 시작했습니다.

주위에도 이 영적인 방황과 회의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방황의 자리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고집스럽게 자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심 ‘지랄총량불변의법칙’이란게 있어서 적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방황과 회의도 어느 정도 한계치가 오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그런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병이 충분히 깊어진다고 저절로 건강해지지 않고, 충분히 방황하고 회의했다고 하여 저절로 좋은 믿음이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 앞에서 꼭 필요한 방황과 회의는 있을 것입니다. 그 ‘거룩한 지랄병’이 진행되는 동안 사랑안에서 기다리고 넉넉한 품으로 기도하며 품어주는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더 바싹 다가앉습니다

더 바싹 다가앉습니다. [말씀동행 20180118목]

남편은 남편대로 한 세상을 살고, 아내는 아내대로 한 세상을 삽니다. 아이들도 크든 작든 나름 꽉찬 한 세상을 삽니다. 어리다고 하여 반쪽짜리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부가 각자 자기 몫의 세상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아이 몫의 세상을 나누어 감당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인생 만큼의 짐도 혼자서 감당하기가 버거운데 어떻게 다른 인생의 짐을 추가로 져주며 살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그런 계산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게 주어진 인생을 주님 앞에서 얼마나 진실되고 성실하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그 삶이 1+1=2 이라는 공식으로 살아지기도 하고, 1+1=100 이라는 공식으로 쓰임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담임목사로서 교회적으로 감당해야 할 역할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또 돌보라고 맡겨 주신 양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걱정도 함께 늘었습니다. 제게 주신 삶을 잘게 쪼개어 여기저기 사용하는 식으로는 금방 바닥이 드러날 것이고, 꼭 감당해야 할 여러 역할들을 점점 더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주님이 제 마음에 부어주시는 마음은 많은 일들을 더 효과적으로 감당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앞에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아내야 하는 저의 일상에 대한 것입니다. 시간과 힘을 쪼개어 이런저런 일들에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는 일도 필요하지만, 주님이 맡겨 주신 제 삶을 더 진실하게 살아내는 것에 그 모든 일의 성패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님이 맡겨 주신 저의 삶을 잘 살아내려고 합니다. 맡겨주신 한 세상을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보기 좋게 그리고 진실되게 살아내면, 그 삶에 진정성이 묻어나는 만큼 주이곳저곳에 필요하신대로 사용하셔서 일도 감당케 하시고 합당한 열매도 맺게 하실 것입니다. 할 일이 많을수록 차분히 주님 말씀 앞에 바싹 다가앉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잃어버리지 않을겁니다

잃어버리지 않을겁니다 [말씀동행 20180110수]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한 성도님이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장로님은 매일같이 동네를 돌며 복음을 전하시면서 많은 분들을 전도하셨는데, 저는 황금어장과 같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열매를 많이 거두지 못해 부끄러운 마음이 큽니다.”

물론, 복음에 빚진 마음과 영혼구원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으로 하신 말씀이신 줄은 알았으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세워주신 자리에서 성실하게 복음의 씨앗를 뿌리는 일일 뿐, 열매는 하나님께서 맺으시는 것이니 그 열매가 적다고 하여 부끄러워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 목표는 가능한 많은 제자를 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능한 큰 무리를 이끌고 다니시는 것도 아니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으신 이유를 분명히 아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일”(요6:39) 이었습니다.

주님은 수천명이나 되는 무리를 이끄는 소위 ‘큰 목회’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일부의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무리’로 대하지 않으셨고 각 사람의 사정과 형편을 모두 아셨습니다. 주님은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를 제자화하지 않으(못하)셨지만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셨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저에게도 언젠가 목회의 위기를 온다면, 그런 식이 위기가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성도들이 더이상 한 사람씩 마음에 새겨지지 않고 ‘무리’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성공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성도의 무리를 이루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영혼들을 하나도 마음에서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살피고 품고 기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어떤 양들은 목자의 관심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어떤 양들은 마음이 들떠서 늘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어떤 양들은 아무리 보듬으려해도 끝가지 버팅기고 고집을 부립니다. 어떤 양들은 아무리 위험신호를 줘도 콧방귀만 뀌고 그만입니다. 어떤 양들은 일부러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신차리고 돌아올 때까지 기도하며 지켜볼 뿐입니다. 때로는 얄밉기도 하고 자존심 상하게 하는 양들도 있지만, 모두 하나같이 제게 맡겨 주신 양들입니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음에 담고 살피는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해고 싶습니다.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요한복음 6:39


매일 위기입니다

매일 위기입니다 [말씀동행 20180104목]

‘위기관리능력’ 이 중요함을 절감합니다. 위기는 개인적으로도 목회적으로도 쉬지 않고 찾아옵니다. 아니, 내적으로 항상 잠재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부분 죄와 미성숙에 있습니다. 그러니 죄가 없는 상태 그리고 완전한 성숙에 이르지 않고서야 언제나 위기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 셈입니다.

지난 한 해, 저도 개인적으로 위기가 많았고 교회적으로도 위기가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위기처럼 보이지 않았을 수 있으나 내적으로는 위험했던 순간이 많았습니다. 성도들 사이에서, 사역들 사이에서, 소그룹 안에서, 의견을 조율하면서, 일을 대하는 다른 관점들과 일하는 다른 방식들 사이에서 많은 위기의 씨앗들이 보였습니다. 때로는 죄로 인한 것이기도 했고, 때로는 개개인의 미성숙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위기의 때에 그 순간을 잘 넘길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위기 자체를 관리하는 능력이나 기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위기의 씨앗이 고개를 들 때에 당사자들이 말씀 안에 붙들려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위기’라는 객관적 실체는 없습니다. 다만 어떤 문제나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마음자세에 따라 위기로 느끼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있을 뿐입니다. 일단 ‘위기’라는 느낌에 주도권을 빼앗겨 버리면 왠만해선 다시 돌아키기가 힘듭니다. 모든 것이 위기로 보이는 관점을 바꾸고, 모든 것을 위기로 느끼는 마음을 환기시키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최고의 위기대처법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바라보며, 주시는 평안 가운데 들어 앉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흔들림 없는 평안이 뒷배로 든든해지면 어느 순간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그 문제와 사안을 왜곡하지 않고 투명하고 바르게 대할 용기가 생깁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문제나 사람을 대할 여유와 능력이 생기면 왠만한 오해나 긴장은 차츰 진정성이 회복하여 풀어집니다. 성도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부부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매일같이 최고의 위기대처법으로 무장하고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살다가 언제라도 위기를 만나면 한탄하거나 이상해 하지 않고, 위기상황을 초래한 사람이나 원인을 원망하거나 싸우려 들지도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새로운 한 해도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많은 위기상황이 예상됩니다. 저는 아직도 목사로써, 남편으로써, 아빠로써 죄의 성향이 짙으며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공급되는 평안의 방석 위에 앉아 모든 위기를 담대하게 대하며 성숙의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 있는 모든 순간이 위기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서 만난 모든 문제는 변화의 기회, 성숙함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겸손한 귀를 주세요

겸손한 귀를 주세요 [말씀동행 20171228목]

주위에 조언자(adviser)들이 많습니다. 가장 가까운 아내로부터 시작해서 동역자들, 때때로 성도들까지 올 한 해 다양한 형식으로 많은 조언들을 제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조언을 해 준다고 해서 다 받은 것은 아닙니다. 불편한 마음에 일부러 흘려 들은 적도 있고, 대놓고 듣기 싫은 티를 낸 적도 있으며, 도저히 동의가 되지 않아 경청을 하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마음을 열고 조언을 귀담아 들은 만큼만 성장하고 성숙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무리 마음을 열고 객관적 상상력을 동원해 본들 성도들과 함께 회중석에 앉아 그 느낌과 경험을 가감없이 설명해 주는 아내만큼 객관적일 순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부교역자 경험이 많다고 해도 지금 동역하고 있는 동료 교역자들의 목소리만큼 현장을 잘 반영한 소리도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확신’이라는 환청을 거부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낯선 조언들’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충고를 잘 듣는 일은 성실하게 ‘자기부인’의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주위로부터 점점 귀를 닫는다는 것은 ‘내가 옳다, 나는 안다’ 라는 교만함이 점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열어두어야 할 것은 ‘입’이 아니라 ‘귀’임을 절감합니다. 들리는 만큼 깨닫고, 깨달은 만큼 고치고 순종할 것입니다. 고쳐진 만큼 삶은 풍성해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과 목회가 될 것입니다. 새 해에는 더욱 겸손한 귀를 갖고 싶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야보고서 2:18


다른 복음

다른 복음 [말씀동행 20171227수]

살다 보면,
목회를 하다 보면,
정답이 하나일 수 없는 상황들을 대합니다.

누구에게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는 “당신 잘못입니다”
강조점이 다른 메세지들을 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둘 모두 진심에서 나온 말이고,
둘 모두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말입니다.

누구에게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라는 메세지가 복음이고,
누구에게는 “당신 잘못입니다”라는 메세지가 복음입니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몸과 마음의 깊은 병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유를 알면서도,
죄를 탐닉하는 삶을 떠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주님처럼,
지혜로운 마음과 분별하는 입술을 가지고
때로는 조심스럽게, 때로는 담대하게
복음을 바로 전하는 목사가 되게 하소서.


부끄러운 고백

부끄러운 고백 [말씀동행 20171221목]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합니다. 한국에서 아이들을 담당하는 교육전도사 초년병 시절이었습니다. 교만하게도 당시 저는 제가 무엇이든 잘 해내는 실력있는 전도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부서 선생님들은 저같은 ‘능력의 종’을 전도사로 둔 것을 감사하고 자랑스러워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장 선생님이셨던 성도님이 제게 할 말이 있다며 오셨습니다. “전도사님, 저는 제가 이 부서에 부장으로써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전도사님께서는 제가 없어도 혼자서 척척 잘 하시니 저는 부장직을 그만두겠습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당시 저는 주변을 돌아볼 줄 몰랐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잘해 보이고 싶었고, 일을 효율적으로 잘 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동역하는 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역자로 보지 않고, 저의 일을 거들어 주는 ‘도우미’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일은 성공적이었지만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을 잃으니 성공도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공로와 칭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듯 했으나, 저와 함께 한 사람들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더 잘할 수 있지만, 꼭 제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면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부탁했습니다. 꼭 제가 아니어도 되는 일이면 다른 분들이 그 자리에 서도록 부탁했습니다. 동역하는 사람들이 의미있고 가치있게 섬기고 사역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또 양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십 수년이나 지난 오늘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라는 리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일, 함께 교회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가 가리워지고 낮아질수록 교회는 더욱 교회다워질 것입니다. 동역자들과 진정한 의미에서 동역할 수 있을 때에 주님의 몸은 더욱 건실해질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진정한 리더쉽이란 나를 가리고 감추어 주변을 빛나게 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강해집니다. 이 고집쟁이, 교만쟁이를 들어 주님과 함께 그 생명의 길, 좁은 길로 끝까지 행하게 하소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30


직접 말씀해 주세요

직접 말씀해 주세요 [말씀동행 20171220수]

수요일마다 교회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습니다. 말씀묵상을 하러 오는 엄마들이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한 자매님이 미안해하며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목사님, 다른 중요한 일로도 바쁘신데 매번 죄송해서요… 아이들은 이제 저희가 돌아가면서 보든지 해 볼께요.”

목사가 하는 중요한 일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설교를 준비하고 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잘 듣고 전달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들 각자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에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설교를 준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일 수 있습니다. 육아로 인해 말씀을 읽을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 힘든 성도들에게 일 주일에 한번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직접 받고 그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환경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요일마다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제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네가 간만에 중요한 일을 하는구나. 덕분에 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내가 직접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좋다.” 그럴 것입니다. 결국 설교도 보다 바르고 정확한 주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전달하기 위함이니, 주님이 직접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도록 돕는 일은 더 중요한 일이겠지요. 그만하라 하실 때까지 계속 하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30


보기 좋아요

보기 좋아요 [말씀동행 20171219화]

함께 동역하던 교회학교 전도사님이 지난 주일을 마지막으로 사임을 하셨습니다. 연초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이긴 했지만 동역하던 분을 떠나보내는 마음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주일 오후에 목회협력위원회(SPRC) 주관으로 송별회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여러 성도들과 함께 고마운 마음, 아쉬운 마음, 추억의 순간들을 이야기하고 축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동역자를 보내는 제게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고마움과 미안함입니다. 고마운 것들 중에 가장 고마운 것은 이 교회를 정말 내 교회로, 내 가족으로 여기고 마음 다해 사랑한 일입니다. 정말 마음 다해 사랑하고 힘을 다해 섬긴 증거와 목격담들이 다양한 그룹의 성도들 입에서 쉼 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마음과 힘을 다해 교회(사람)를 사랑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의 삶과 사역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지점이 생겨납니다. 단순히, 자기관리(self-care)나 사역의 범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를 ‘기관’(organization) 이나 ‘모임’(group)으로써만 섬긴 것이라면 공사의 경계를 분명히 할 수 있겠지만, 맡은 사역이 다름 아닌 사람(교회)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일상과 어떤 식으로든 깊이 있게 연결되지 않고는 그 진정성이 드러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안한 것들 중 가장 미안한 것은 아직 많이 부족하고 서툰 초짜 담임목사의 리더쉽이었습니다. 더 품어주어야 할 때 품지 못하고, 더 기다려 주어야 할 때 기다리지 못하고, 사정을 미리 알아 챙겨주어야 할 때 마음을 다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합니다. 그래도 감사하게도 이곳에서 동역하는 동안 주님께서 저도 전도사님을 통해 배우고 자라게 하셨고, 전도사님도 배우며 아름답게 자라게 하셨습니다.

얼마전 아내와 전도사님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요즘 박전도사님 여러모로 참 보기 좋아~ 그치?” 주님도 분명 보시기에 좋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린도전서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