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발로 조심조심

까치발로 조심조심 [말씀동행 20171215금]

사는게 지뢰밭을 걷는 것 같습니다.
조심조심 경계하고 살펴야 할 일들이 점점 더 많이 보입니다.

어쩌다 미숙하고 무례한 세상 사람들을 만나
제가 상처입고 아픔을 당할까 두려운게 아닙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지뢰밭이 제 안에 있습니다.
이따름 모른척 죄의 길에 앞장 서기도 하고
때로는 기름에 불붙듯 죄의 길에 서둘러 따라 붙기도 합니다.
누구라도 제 안의 죄와 혈기, 교만의 뇌관을 건드리면
마치 민감하고 파괴력 좋은 지뢰처럼 반응합니다.

그런 죄의 불씨, 죄의 기름을 마음에 담고 살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새어 나와 불을 내고 귀한 것들을 태워버릴까,
노심초사하며 지뢰밭을 걷는 것 같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주님은 불은 꺼 주시고 기회를 또 주시겠지만
그래도 작고 소중한 사람들 마음 데일까 두려워 까치발로 살려 합니다.
주님 따라 까치발로 좁은 길 다니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잠언 4:23


내 손에 있느니라

내 손에 있느니라 [말씀동행 20171215금]

아내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틈틈이 도예(Ceramic) 수업을 들어왔습니다. 성찬에 사용할 컵과 쟁반을 직접 만드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며칠 전 수업시간에 만든 작품들을 집으로 가져왔는데 아이들이 서로 자기가 갖겠다고 난리입니다.

아내가 아이들을 불러 놓고 작품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이건… 만들다가 부러져서 버릴려다가 그냥 부러진 모양 그대로 만들어 본건데 특이하지? 이 작은 종지 그릇들은… 원래 만들려고 했던 것을 실패해서 그 짜투리 조각들을 가지고 만든 건데 이렇게 예쁘게 나왔어. … 그리고 이건…” 모양이 특이하고 개성있게 잘 나온 작품들 중에는 ‘패자부활전’을 거친 것들이 많았습니다. 도중에 실패하고 망쳤던 것들을 버리지 않고 보수하여 구워냈더니 오히려 가장 맘에 드는 작품들이 되었답니다. 실패가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유함과 독특성이라는 흔적을 품기 위한 일련의 과정 같이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들을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작품으로 빚어가시는 과정도 비슷해 보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상처를 치유받고, 약한 부분이 고쳐지면서 새롭게 빚어진 인생들이 아름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흠없이 반듯한 인생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이 닿은 흔적들은 분명히 품고 있습니다.

이런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깨지고 상처입고 망가진 것 같은 인생을 가지고 주님 앞에 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고 그 분께 영광이 될만한 인생이 되기에는 이미 틀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이 특별해지는 이유는 다른 것들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 부분에 주님이 만져주신 흔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기대처럼 살아지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계획은 틀어지고, 예상하고 기대했던 인생의 모습은 이미 되찾기 힘들게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 실패도 아니고 망가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주님의 손에서 어떤 모양으로 빚어져 나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주님의 손에 의해 보수되고 고쳐지고 있다면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세상에 하나 뿐인 걸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예레미야 18:6


죽여 주시고 살려 주세요

죽여 주시고 살려 주세요 [말씀동행 20171205화]

오늘 이웃을 통해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파트 단지내 수영장을 관리하시던 분이 지난 목요일 심장마비(Heart Attack)로 갑자기 돌아가셨답니다. 날씬하고 훤칠한 키에 단단해 보이는 구리빛 근육질 몸매를 하신 정말 건강해 보이는 중년 남성분이셨습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단지내 야외 수영장을 종일 관리하시고 지켜주시던 분이셔서 뵐 때마다 눈인사를 하던 사이였는데 안타까웠습니다.

믿는 사람 중에 죽음의 문턱을 직접 다녀온 사람이나, 아주 가까이서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대개 두 가지 상이한 삶의 태도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힘을 아주 빼고 살거나’ 혹은 ‘더 조급해 하며 쫒기듯 살거나’ 합니다.

한 부류는 언제라도 주님 부르시면 갈 인생이니 가능한 투명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힘을 빼고 살다가 언제든 담백하게 가겠다는 태도입니다. 특히나 목회자들 중 이런 분들은 더이상 겁낼 것도, 잃을 것도, 누구 눈치볼 것도 없으니 당당하고 소신있게 그리고 힘을 뺀 채로 설교하고 목회하는 것이 보입니다. 멋있어 보이고 또 그 영향력이 목회의 전반적인 부분에 스며 있는 것이 보입니다.

또 한 부류는 같은 두려움과 불안함에 떨며 긴장하며 사는 태도를 보입니다. 죽음의 위험이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니 가능한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모든 일에 조심하며 쫒기듯이 삽니다. 삶의 근육은 점점 경직되고, 얼굴과 마음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점점 어두워지고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손에 삶을 맡기고 사는 사람은 말투도 안정되고, 행동도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영원한 목적지를 날마다 코 앞에 두고 살다보니, 이 땅의 삶은 마치 지나가는 여행자처럼 힘을 빼고 대하게 됩니다. 그 태도가 관계에 있어서나, 소유에 있어서나, 무엇을 성취하는 일에도 자유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고민이 있습니다. 죽음을 코 앞에 둔 사람처럼 살려고 해도,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이 땅에 익숙해진 마음과 육신은 또다시 땅의 것을 영원한 보물처럼 여기며 목을 매려 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매일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생으로 죽기만 하려 들면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어 우울증도 옵니다. 죽는 동시에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주도적으로 사시는 날에는 나의 삶이 거칠것 없는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 날이 진짜 살아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나의 생각과 계산으로 삶을 가득 채운 날에는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함이 엄습합니다. 그런 날에는 ‘이러다 정말 죽겠구나’ 싶습니다. 주님, 날마다 사는 것 같이 살고 싶습니다. 날마다 저를 죽여 주시고 또 살려 주소서. 아멘.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5


짠하게 봐 주어라

짠하게 봐 주어라 [말씀동행 20171201금]

오늘 아침 아이들 등교길에 스쿨버스 타는 곳까지 함께 갔습니다. 시완이가 물어볼 것이 있답니다.

“아빠~ 하나님이 만든 천사 있잖아, 나쁜짓 해서 땅으로 쫒겨난 천사~ 그런데 그 천사도 우리처럼 잘못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다시 하늘나라에서 살게 해 주셔?”

“그럼~ 그 천사도 우리 처럼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하면 용서해 주시겠지~ 그런데, 그 천사는 계속 잘못했다고 안하고 있거든~ 불쌍하지~” 시완이 마음에는 타락한 천사, 마귀도 짠해 보였나 봅니다.

살다보면, 마음과 생각이 굳어서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없이 용납하고 품고 있기가 버거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짠해 보이는 마음마져 식어 버리면 즉시로 그 사람의 허물과 부족함과 죄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또 그것만 바라보고 있으면 거의 가능성이 없는 존재처럼 믿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저를 먼저 짠하게 봐 주신 하나님의 눈이 그런 저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친하다는 것,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것,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의 가장 큰 증거는 누가 뭐래도 ‘주님을 닮은 눈’에 있습니다. 마귀의 일을 하던 가룟 유다조차도 주님은 끝까지 ‘짠한 눈’으로 봐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편에 있는지 아닌지는 주님 닮은 짠한 눈을 뜨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짠하게 봐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짠하게 봐 주거라.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서로를 짠하게 봐 주는 눈이 사라지면 하나님의 역사도 그칩니다.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룬들 실패한 교회, 실패한 제자의 삶이 됩니다.

정의와 공의를 이루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 닮은 짠한 눈길을 잃은 정의의 손길은 주님 앞에서 결코 당당하지 못합니다. 죄를 들추고 정죄하려면 목사인 제게서도 순식간에 수십, 수백가지를 들추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짠한 눈길을 생명처럼 지키는 교회와 가정에서는 한겨울에 얼어 붙은 땅에서 파릇파릇한 새싹을 틔워내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말씀동행 20171124금]

‘예수청년’들의 ‘2030 컨퍼런스’가 어느새 중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습니다….

거의 잠을 못 자고 섬기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스탭들의 여유있는 얼굴이,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묻어나는 그룹 카톡방 대화가 아름답습니다.

말씀을 전하시는 분과 찬양을 인도하시는 분, 강의와 세미나를 인도하시는 분들이 서로가 전한 메세지를 보완하고, 강화하며, 맡은 역할을 겸손히 감당하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고마워요’ ‘수고가 많아요’ ‘밥은 많이 먹었어요?’ ‘어디서 왔어요?’ ‘뭐 도와 줄 일은 없어요?’ ‘정말 괜찮아요?’ 하고 조원들을 챙기는 ‘2030 하나님나라 겨자씨’ 같은 조장들의 마음과 성실함이 아름답습니다.

저녁집회 후 늦게까지 모여 청년세대를 어떻게 돕고 연합하며 하나님나라를 이뤄갈지 고민하며 논의하는 강사님들과 로컬교회 교역자분들의 대화가 아름답습니다.

밤 늦게까지 조모임을 하느라 잠을 자지 못하고서도 ‘자신과의 타협없이’ 새벽기도회에 나와 자신의 인생과 하루를 주님 손에 의탁하는 ‘예수청년’들의 모습이 아릅답습니다.

남은 날들은 남은 아름다움들이 더해져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하나님나라는 물론, 보이지 않는 디테일의 하나님나라까지 온전히 계획하시고 이루어가시는 성령님을 오늘도 의지합니다.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0~21


바람이 부는대로

바람이 부는대로 [말씀동행 20171121화]

제16회 ‘2030 컨퍼런스’가 ‘하나님나라, 살다!’ 란 주제로 오는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진행됩니다. 현재 북미 전역에서 340여명의 청년들이 등록했습니다. 40여명의 스탭들과 협력교회 목사들이 하루 일찍 숙소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스탭들 기도회에서 대회장 목사님은 ‘광활한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돛단배’의 이미지를 나누셨습니다. 돛단배는 바람으로 움직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돛을 내리고 바람이 다시 일때까지 그저 기다립니다. 바람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조급해 하지 않습니다. 바람을 주시는 만큼만 가면 되고, 주신 바람의 세기 만큼만 속도를 내면 되기 때문입니다.

컨퍼런스의 목적은 설사 단 한 영혼만 변화시키는 것이라 할찌라도 주님의 뜻을 이루며 동행하는 것이지, 얼마나 큰 돛단배를 만들어 폼나게 스피드를 낼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컨퍼런스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땐 인내와 소망 가운데 기다리고, 바람이 불 때는 기쁨과 감사로 두 팔을 벌리면 됩니다. 결국 주님이 또 이루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편 131:3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말씀동행 20171120월]

어려운(슬픈) 장례를 인도했습니다. 이제 겨우 3살된 예쁜 딸을 두고 간 30대 중반 자매의 장례였습니다. 남편에게도 친엄마에게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온가족이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으며 영적인 방황을 했던 터라 속한 교회도 없었고, 시카고에 정착한지도 오래지 않아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예닐곱의 유가족과 회사 동료 서너명이 전부였습니다.

다행히도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저희교회 성도님들이 장례예배에 많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묵상글을 통해 알게 되신 어떤 분은 무명으로 위로금을 전해 달라며 제게 따로 부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딸과 아내, 며느리와 엄마를 잃은 유가족들은 큰 슬픔과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새파란 딸을 잃은 엄마의 절규가 계속됐습니다. “어떻게 이런 딸을 데려가? 어떻게 이런 딸을 데려가?” 온기가 사라진 딸의 얼굴을 자신의 볼에 비비며 목놓아 우셨습니다. 그렇게 애통은 원망이 되고, 원망은 분노가 되고, 해결되지 않는 분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로 부어져 죄책감의 화살이 마음에 박힌채 평생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복음과 함께 예수님의 분명한 메세지도 전했습니다. 나면서부터 맹인된 것이 부모의 죄인지, 자신의 죄인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또 망대가 무너지는 사고로 죽은 열여덟명의 죽음에 대해서 ‘그들은 우리보다 더 큰 죄인들이었기때문이지요?’ 라는 눈빛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오직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요9장)

‘알수없슴’은 그대로 잠시 묻어두고, 그로 인해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에 집중할 차례입니다. 장례는 끝났지만 이 일을 통해 남은 유족들에게 행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된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습니다. 남은 자들을 향한 기도와 위로와 돌봄과 도움입니다. 주체할 수 없을만큼 무거운 죽음의 무게 앞에서 저도, 성도님들도 진정한 교회됨의 의미와 존재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3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말씀동행 20171118]

몇 주 전, 우리교회 한 성도님 가정을 통해 기도부탁을 받은 가정이 있었습니다. 저보다도 연배가 어린 부부였고 세 살된 딸을 둔 교회에 다니지 않는 가정이었습니다. 아내 되시는 분이 정기검진중 갑자기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일 년 넘게 골수이식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얼마 전에 골수이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면역력이 약해진 탓에 폐렴이 왔고, 안타깝게도 뇌에까지 감염이 되어 갑자기 중환자실(ICU)로 옮겨졌고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지금은 기계의 힘을 빌려 호흡과 혈압을 간신히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담당의사는 하루 이틀 사이에 호흡기를 떼야 할 것 같다는 믿겨지지 않는 소견을 냈습니다.

남편 분이 교회 성도님을 통해서 아내분을 위해 장례를 집례 해 줄 수 있는지를 물어오셔습니다. 여기 시카고에 자기 가정 말고는 아는 사람도 없고 연고도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사정이야기를 듣고는 아내와 함께 병원에 심방했습니다. 남편분의 양해를 얻어 이미 의식이 없는 아내 분을 위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자매님, 조선형목사라고 해요. 제 말이 지금 들리실지 모르나 몸으로는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을지라도 영으로 듣고 하나님께 영으로라도 응답하실 수 있기를 바래요…” 의식이 없는 아내 분의 귓가에 대고 복음을 전한 후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 드리는 기도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어제 오후, 자매님은 부모님과 남편, 세 살된 딸 아이를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은 가족들 모두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름 석자 밖에 모르는 분들이었지만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리더쉽팀과 여러 그룹에 알리고, 오는 주일 오후에 예정되었던 새가족 환영식을 연기했습니다. 대신에 가능하신 분들은 저녁 장례예배에 함께 참여해 함께 울어주고 위로가 되어 주자고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성도분들이 함께 참여하여 기도하겠다고들 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탄식, 한숨들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두려움과 절망 속에 있는 이들과 함께 울며 곁에 있어 주는 일 또한 주님이 교회에 부탁하신 귀한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5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동행 20171107화]

한인연합감리교회를 담임하시는 미국 전역에서 오신 목사님들이 시카고에 모여 임시 총회 모임을하시는 중에 있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30대 목회자부터 40, 50, 60대 그리고 은퇴하신 70대 목사님들까지 거의 대표자격으로 모인 자리였고 저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한 마음과 그에 대한 총회의 바람직한 역할에 대해 막힘없는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화속에 오해가 생기기도 했고, 같은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들도 보였습니다.

저녁 모임을 마무리하면서 가장 연장자이신 한 은퇴 목사님께서 폐회기도를 하셨습니다. “주님, 저희가 오늘 모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마다 서운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희 모두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만큼은 같다는 것을 아십니다….” 진솔한 목사님의 기도에 여기저기서 ‘아멘’ 소리가 들렸습니다.

공통분모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비록 모인 분들의 경험이 다르고, 살아온 시대가 다르고, 표현방법도 개성이 있고, 목회 연륜과 성숙함도 모두 다르지만 저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그 자리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생명 주고 사신 교회를 그토록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의 이견과 다른 경험에 귀 기울이고, 그리고 심지어 서로를 설득하려고 소리를 높이는 순간마저도 애틋하고 절절합니다.

가정도 그렇고 개체 교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어떤 교회는 회의도, 의견 수렴의 과정도 없이 처음부터 한 가지 생각에 잘 순종하고 따른다며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부럽지도 위대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건강치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때로는 언성이 높아질 정도로 자신의 생각에 대한 소신이 있지만, 사랑으로 인해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또 기울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성숙한 모습일 것입니다. 아직 한참 미숙한 사람이 어른 분들 사이에서 많이 배우고 도전받고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2


내게 허락된 점 하나

내게 허락된 점 하나 [말씀동행 20171030월]

지난 화요일 너싱홈에서 영접기도 인도를 해 드렸던 분이 이틀 후 소천하셨습니다. 본래 다니던 교회도 없고 그 동안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던 터라 장례를 부탁할 목사님이 없다고 하시며 유가족이 제게 장례 집례를 부탁하셨습니다.

고인의 삶에 대해 아는 것도 없이 장례예배를 인도할 수 없어, 토요일에 유가족분들을 만나 고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묵상하면서 주일 저녁, 고별예배와 오늘 오전, 발인예배와 하관예배를 집례했습니다.

장지에서 하관예배를 마치고 헌화와 취토를 했습니다. 그리고 땅 속에 안장된 관을 보았습니다. 관의 덮개에는 고인이 이 땅을 사셨던 기간이 적혀 있었습니다. “1924 – 2017”

“-“ 점처럼 보이는 그 하이픈 표시 안에 고인의 94년 인생이 모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점 안에 기쁨과 소망과 즐거움의 순간도 있고, 슬픔, 고통, 절망과 외로움의 순간들도 녹아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생을 마무리하고 땅 속에 들어가니 고인의 100년 가까운 인생살이가 점 하나로 요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점 하나 같은 짧은 인생이기에 쾌락을 즐기며 살기에도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 주신 소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살기에도 마음이 급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게 허락된 점 하나를 저는 남은 시간 무엇으로 채우며 살지를 다시 새기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마태복음 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