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을 위로하라

어제 설교 중에 했던 일부 내용을 옮깁니다. 며칠 전 갑자기 오래전 꾸었던 꿈 하나가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신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집이 지방 시골이었던 저는 서울에 사는 한 후배 전도사 집에 종종 놀러가 잠을 잤습니다. 후배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목회하시던 교회와 사택이 한 건물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그 후배 전도사와 함께 새벽에 일어나 아래층 예배당에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다시 올라와 잠을 청했습니다. 그 날 새벽에도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면 좋을까 하는 고민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올라온 날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너무도 생생하여 마치 환상같기도 한 꿈을 꾸었습니다. 한 손이 제 앞에 놓인 조그마한 종이쪽지에 메모를 하고 있었는데 꿈 속에서 그 손이 분명한 주님의 손임을 알았습니다. 써 내려간 글자는 ‘사 40:1’ 이었습니다. 그 글자가 ‘이사야 40장 1절’ 의 줄임말임을 꿈 속에서 알아챘습니다.

꿈에서 깨자마자 바로 머리 맡에 두었던 성경을 찾아 보았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목회를 하라고 하시는 응답으로 받았습니다.

며칠 전 문득 십 수년전 꾸었던 이 꿈이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이런 저런 일로 힘들어하고 고난가운데 있는 맡겨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위로하고 또 위로하라는 마음을 부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주일 아침 1부 예배를 준비하러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오랜만에 가족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모습 그대로 저 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가 각자 있는 자리에서 위로의 사명을 감당하는 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40:1


낮은 언제 오는가?

아프리카의 원로 셋이 서구를 방문했다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군가 방문객들에게 물었습니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하십니까?”

첫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구별해 볼 수 있게 되면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된 것을 압니다.”

둘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초원에 동물들의 형상이 보이면 어둠이 떠나고 밝은 낮이 찾아온 것을 안다오.”

셋번째 방문객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흑인 여자와 백인 여자가 서로 ‘자매’라 부르고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서로 ‘형제’라 부르는 모습이 보이면, 비로소 어두운 밤이 걷히고 환한 낮이 온 것이오.”

만일 저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이끌려 우리의 일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려는 정복전쟁이 시작되면 비로소 밤은 물러가고 낮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하고 의지하여 마치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듯 우리의 일상을 향한 정복전쟁이 시작될 때 비로소 실감나는 신앙생활, 인격적인 주님과의 동행이 시작됩니다. 영적인 무방비 상태, 비무장 지대인 우리의 일상이 거룩하게 변한다면 못 변할 곳은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빛에 온 종일 노출되어 살고 싶습니다. 갈길이 어디인지 비추시는 성령의 빛으로 더욱 환하게 인도함 받고 싶습니다. 주님의 동행하심이 한 낮의 해처럼 우리의 삶을 둘러 비춰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


초인입니까?

“초인적 위업은 한달음에 고층건물을 뛰어넘거나 서핑보드 위에서 삼중 회전을 뽐내는 것이 아니다. 초인적 위업이란 놀라운 용서의 행위, 배반의 골짜기에 다리를 놓는 행위, 두려움을 극복하는 행위, 거부를 거부하는 행위, 사랑을 풀어 내는 행위, 신학 논쟁을 초월하는 행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 관계의 영성, 레너드 스윗

초인적 위업은 사랑에 관한 일입니다. 용서에 관한 일입니다. 용납에 관한 일입니다. 고슴도치 처럼 가시로 무장한 영혼을 피를 흘리더라도 끌어안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초인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자아를 초월하여 나는 죽고 주님으로 덧입을 때에야만 초인이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초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으로 살지 말고 주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덧입은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능력으로 어떤 초인적인 일을 이루려고 하고 있습니까? 초인적인 능력이 아침마다 우리 일상에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에베소서 4:32


행복할 궁리하며 살다

시완이가 요 며칠 언니를 스쿨버스까지 바래다 주는 길에 동행 하고 있습니다. 언니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고 나면 시완이가 곧장 달려가는 곳이 있습니다. 길가 한쪽에 있는 꽃밭입니다.

아침마다 작은 꽃송이 하나를 조심스레 꺾어서는 뭉개질까 움켜쥐지도 못하고 조심조심 들고 옵니다. 아침마다 엄마에게 줄 선물이랍니다. 현관 문을 열고 ‘엄마~ 선물!’ 하고 외칠 순간만 기대하면서 작은 손에 고이 간직해 옵니다.

엄마의 환한 미소와 꽃을 맞바꿉니다. 엄마의 미소는 금새 시완이의 얼굴까지 번져갑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소짓게 하기 위해 무엇을 생각했고 어떤 수고를 했는지 돌아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중요한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번지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미소는 그 미소를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에까지 금새 번집니다. 행복이란 이런 경로로 찾아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을 위해 딱딱한 율법으로 지켜내라고 주신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을 먼저 미소짓게 만들면 그것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금새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믿는 자들이 따르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받을 자격, 용서받을 자격, 미소지을 자격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일수록 이러한 삶의 방식이 더 필요합니다. 자격없는 우리들이야말로 먼저 그 은혜를 입어 행복의 선순환을 시작하게 된 산 증인들입니다. 아침부터 종일 사랑하는 주님을 미소짓게 할 궁리를 하며 사는 사람이 덩달아 행복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할 생각을 하면 등교길도 출근길도 퇴근길도 가슴 뛰는 여정이 됩니다.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로마서 13:9


옳은 것보다 나은 일

‘주님의교회’(알라바마 몽고메리) ‘한영혼축제’에서 말씀을 전하고 왔습니다. 매 시간 말씀을 전하기 전부터 은혜와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을 전하러 갔지만 오히려 제가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눈이 밝아져 온 느낌입니다. 주일 오후에는 목사님 댁에 들려 목회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서로 공감하며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면서 목회하자는 이야기였습니다. 소신 없이 목회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누군가의 생각과 의견이)는 이기고 누군가는 지는 구도로 교회가 향하지 않도록 힘써 지키자는 말이었습니다.

시카고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책에서 같은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관계를 지키기보다는 저마다 자기가 옳다는 바람에, 교회가 세상 문화에 대해 신뢰를 잃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내 입장이 옳고, 내 판단이 옳고, ‘바른’ 성경 해석도 내 방식이 옳다고 우긴다. 같은 신앙을 가진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보다는 내가 이겨야 직성이 풀린다…” [관계영성, 레너드 스윗, p.153]

예수님은 원수 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깨어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영적 회복이 일어나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될 때 그 영적 회복이 현실에서 경험됩니다.

매일 같이 죄의 음성이 귓가에 스칩니다. ‘이번엔 누가 뭐래도 네가 옳아~’ 만일 옳아서 더 문제라면 옳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관계보다 사람보다 교회보다도 옳은 것을 따지는 일이 더 중요했다면 애당초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오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누가복음 16:15


잘 노는 연습

지난 주말을 이용하여 교회 수양회를 다녀왔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주일 아침까지의 일정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와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마디로 재미있었습니다.

수양회 기간 동안 아침 기도회를 빼고는 따로 예배/집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종일 놀고 먹고 수다를 떨고 쉬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연습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연습이었습니다. 일상 속에서 서로서로를 살피면서 먼저 섬기고 더 많이 섬기는 과정을 통해 거룩함을 연습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노는 일이 가능해 질 때 영성이 깊어집니다. ‘369’ 게임을 했습니다. 아이부터 청년, 중년까지 한 자리에 모여서 게임을 했습니다. 단순한 게임 중에도 많은 생각과 반응이 오갑니다. 아이도 동참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 감당할 만큼 벌칙 수위를 조절해 주는 마음, 나의 기분보다는 전체의 분위기를 위해 참고 인내하는 마음… 서로의 마음을 읽어가면서 조절하고 맞추어가는 성숙함이 보였습니다.

이러한 마음들은 교회 사역을 하는 중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적용됩니다. 서로의 마음과 형편을 조심스럽게 살펴주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사역을 나눠 섬기고 각 부서나 개인의 유익보다 교회 전체를 위하는 마음이 우선일 때 교회는 점점 더 성숙해집니다.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 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일상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가 결국 삶의 모든 영역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재미있게 노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 안에서 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예외 없이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런 사람의 예배의 삶과 섬김의 삶은 볼 것도 없습니다. 분명 주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 섬김, 사랑의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노는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종일 거룩함을 연습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디모데전서 4:7